<6월5일 일요일: 시편 13-17편>
시편 13편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분이시다. 신앙인의 모든 탄식과 절규는 바로 이 때문에 온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비웃은 원수들이 자신들이 승리자임을 자랑하면서 감히 “악이 승리한다!”라고 하며 불의를 일삼을 때, 신앙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또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항변의 탄식을 하게 된다.
시편 14편
시편 14편은 분명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지적 무신론”을 비판의 중심에 둔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이다. 진정한 무신론은 어떤 궁극적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지 않고에 의하여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행위와 삶에 의하여 판단되는 것이다.
시편 15편
주의 장막에 유하며 주의 성산에 거하는 삶이라는 말로 비유하는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이야말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삶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보다는 사막을 40년 동안이나 인도하고 이끄시며 인간 가운데 오셔서 인간과 함께 하셨던 바로 그 ‘장막’에 유하며 영원토록 거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 화려한 성전에 잠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장막’이라 하여도 하나님과 동행 동거하는 삶이 우리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할 것이라는 ‘임마누엘’ 신앙의 선포,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시편 16편
시편에 포함된 대표적 ‘신뢰의 시’중에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그 기조로 하여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신뢰를 이끌어 낸 유일한 시가 시편 16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유일신 신앙은 10-11절에서 “죽음의 극복”, 즉 “죽음의 상대화”라는 신앙에까지 도달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은, 유일신 신앙의 세계에서는 결단코 각각의 다른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을 갖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17편
주께 부르짖는 자가 주를 만나고 체험하는 일은 하나님 신앙의 요체요, 신비이다. 신명기를 중심하여 그 신학을 계승하고 있는 구약성서는 한편으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최상의 만족을 누릴 것이라고(시 17:5)말한다. 물론 우리는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현현 경험의 제의적 전통”이라는 문맥에서 이 주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6월 6일 월요일: 시편 18-19편>
시편 18편은 야훼 하나님께서 그가 세우신 왕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과 그의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베푸신 계약적 신의의 사랑을 증언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의 구원 사건이, 즉 애훼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름 부음을 받은 그 종이 경험한 바, 사망의 위협을 이겨낸 그 구원 사건이 야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하여 영원토록 그리고 다윗과 그 후손에게 대대로 계승되리라는 것을 증언함으로써 우주적 사건으로 확대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편 19편은 보이지 않는(볼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양식을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있는 시이다. 출애굽기 33:18-23에서 증언되고 있듯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이것이 천지 창조 이래 오늘까지 우리 인류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자꾸 보여 달라고 보채는 빌립과 같은 것(요14:8-9)이 되어서는 안 된다.
<6월 7일 화요일: 시편 20-24편>
시편 20편 시인은 왕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1절)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음을 선포하는 말로 끝나도록(5절)로 하였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전쟁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전쟁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21편에서 나오는 왕의 길은 긴장의 연속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길이다. 이스라엘의 왕정제도의 도입 문제가 신명기와 신명기적 역사서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울-다윗-솔로몬-분열 왕조와 최후의 남은 유다 왕조, 특히 전혀 예기치 못한 요시아의 전사 사선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왕조사는 결국은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하다가 결국은 무너져 버렸다. “야훼를 의지하는 왕은 영원히 요동하지 않으리라” 야훼만을 의지하면 왕은 영원히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편 22편의 신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이 시를 암송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저토록 절망의 나락의 경지에서부터 새 생명의 우주적 희망을 창조해내는 새로운 세계로 전이해 가는 이 시인의 믿음이 갖고 있는 신비이다.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은, 실제로는 우리 인간을 결코 절망 속에 남겨 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이러한 신앙적 각성은 이미 처음부터 이 시를 메시아적 해석, 기독론적인 해석의 길을 철저히 예비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시편 23편 – 여섯 절 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구에도 불과하고 또 목가적 아름다움으로 휩싸인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중심주제는 결단코 시의 서정적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에 있지 않고 구원사 전승을 구성하는 중심주제들 중의 하나인 “인도하시다”를 처음부터 끝까지 잃지 않는 그 뛰어난 문학적 천재성을 보면서 우리는 그저 놀랄 뿐이다.
시편 24편 – 땅은 야훼의 것이다! 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야훼께서 계신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도덕적 자격이 있는 “토라의 기초적 규범”을 지켜온 자들이 누구인지를 물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영광의 왕은 야훼이시며 그 영광의 왕이 온 땅의 주로서 현현하실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또 고대하는 희망으로 끝맺는 시가 24편이다.
<6월 8일 수요일: 시편 25-29편>
시편 25편 – 영원 전부터 영원자와 함께 있어서 그 영원자의 본질 그 자체를 형성한 “인자”와 “긍휼”이 야훼의 본질임을 안 이 시인은 “주여 이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모든 기원의 기초로서 제안하였던 것이다. 사실, 복음의 진수는 이 기원 속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시편 26편 –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이 자기 완전함에 의하여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럼에도 자기 무죄를 변호하는 이 시인은 “내가 나의 완전함에 따라 나의 길을 걸었사오니, 야훼여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으로 그는 그의 기도문의 시작과 끝을 구성하였다. 비록 토라의 절대적 가치를 외쳐 온 구약종교라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 완전함으로 자기의 무죄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념을 내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야훼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시 130:3)” 라는 고백이 인간의 진실한 자기 고백이다.
시편 27편 –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살기 찬 추적을 받고 있는 한 “무죄 변호자”가 그의 “무죄 변호의 시”의 서두를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확신의 반복 표현을 앞세워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면, 그의 고백의 그 신앙적 근거는 무엇일까? 분명 그것은 이 시의 서도와 결어 사이를 밀접히 결속시키는 그 근본 요인이라고 하겠다.
시편 28편 – 시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무고자의 추적을 피하여 성전 성소의 하나님의 현존 장소에서 무죄변호를 받으려고 하였던 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려고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생사를 걸고 부르짖다가 마침내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또 그를 추적하는 원수들도 격퇴시키는 놀라운 구원의 체험도 하였다.
시편 29편 – 야훼는 뇌성의 주이시고 뇌성은 야훼의 현현에 동반하는 사자요, 전령일 뿐이다. 가나안 종교의 뇌성의 “신의 소리”요, 이 신의 소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단지 “뇌성”일 뿐이다. 야훼의 말씀이 영원한 유일의 왕이시고 모든 자연 질서와 역사 질서를 통괄하시고 자기를 따르는 백성에게 힘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6월 9일 목요일: 시편 30-33편>
시편 30편 – 우리의 확신이 항상 우리의 현실에 대한 최선의 판단인 것은 아니다. 이 기초적이고도 일반적인 판단이 이른바 무덤으로 내려가는 상황에까지 갈 정도로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인 구원체험을 한 시익이 그 위기 상황에서 깨달았던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시편 31편 – 이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안전을 찾기 위하여 비록 우리가 어디로 도피한다고 하여도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을 제공해 주는 곳은 이 세계에는 없다. 과연 우리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시인은 주님의 앞에! 라고 대답한다. 야훼께서는 자기 앞 에 악인들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곳, 이른바 신실한 자들을 숨겨둘 곳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이 진리요, 사실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 확정해 준다고 하겠다.
시편 32편의 최대의 매력은 솔직한 죄의 고백을 요구해 오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 고백을 받으시자 곧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증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은 죄를 주시는 분(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토설을 원하셨고 뼈가 쇠하도록 그리고 진액이 마르도록 죄의 토설을 압박해 오셨던 것이다.
시편 33편 – 힘의 논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이념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인자하심에 대한 신앙과 신학이 우리 삶의 중심부에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은 문자 그대로 약육강식의 정글사회일 뿐이다. 인류 세계의 최고 지식인들이 짜낸 지식들은 삶의 지혜가 아니라 속임수적인 희망으로 우리를 오도하고 있다. 창조의 주와 역사의 주에 대한 신앙이 우리 삶의 중심부에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은 거짓 희망의 안내를 받으며 찬조 이전의 혼돈으로 흡입 소멸되고 말 것이다.
<6월 10일 금요일: 시편 34-37편>
시편 34편 – 야훼의 선하심은 그의 구원의 능력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야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말은 야훼의 구원의 능력을 맛보아 알라는 의미의 말일 것이다. 물론 맛보아 안다 라는 말은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 전서 2:2-3은 “주의 인자”를 “신령한 젖”이라는 은우로 설명한 바 있다. 어린아이처럼 순전하여 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이 젖을 먹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하였다.
시편 35편 – 이유 없이 고소를 당하는 자들은 그가 믿는 하나님 앞에 그가 겪은 쓰디쓴 고난의 경험들을 다 쏟아 놓은 다음에라야 비로소 “나는 너의 구원이니”라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갖는 그 의미의 깊이를 깨닫게 된다.
시편 36편을 통해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함과 더불어 창조된 세계의 혼돈을 제거하는 빛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빛 안에서 모든 불투명한 것이, 모든 혼돈스러운 것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고 질서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하겠다.
시편 37편 – 시인은 “악인의 번영에 대한 질투와 투기”라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다. 시인은 매우 대담하게도 자신을 야훼 하나님의 응석받이가 되게 하여 야훼 하나님의 품속으로 내어 던지는 그런 믿음으로 “악인의 번영에 대한 투기”라는 인간 심성의 늪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너의 길을 야훼에게 맡겨버려라. 그를 기뻐하라. 그를 의지하라. 그러면 그가 그 모두를 이루시리라”(4-5절)
<6월 11일 토요일: 시편 38-40편>
시편 38편 – 시인은 욥이 걸었던 길과는 정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자신의 친구들, 친척들이 다들 자신의 상처를 멀리하여 물러나 서있고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올무를 놓고 터무니 없는 악한 험담을 하여 악한 궤계를 도모할 때(11-12절) 그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않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않으며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변박함’을 아예 없애 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린 것이다. 야훼 하나님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의 분수령에 입을 다물고 서서 단지 다음 세 마디 말만을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나를 속히 도우소서!”
시편 39편 – 인간의 모든 실존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한다. 이것이 정답이다. 시편 39편 시인이 그 복잡한 신학적 상념 끝에 내린 결론도 바로 이것이었다.
시편 40편 – 야훼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이 시인을 ‘스올’과 같은 깊은 수령에서부터 건져내셨다는 것, 이 구원체험의 놀라움(1-5절)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한 놀라운 예언자적 각성에 도달케 하고 이 계시에 대한 이 기쁜 소식(9절)을 대회 중에 선포하게 하였다고 이 40편 시인은 증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기뻐하시고 인간으로부터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인은 직접 자기 귀를 통하여 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법”에 자신의 삶을 복종시키는 겸손한 복종이 즉 육화된 말씀이라 하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무엇인가?” “희생제물로 육화된 나 자신이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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