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헤의 성례전 (정연희 권사)

카테고리: 에세이 및 간증

< 은혜의 성례전 >정연희

토요일 저녁이면 다음날 등교하는 아이가 준비하듯 가방이며 준비물을 챙기고 잠자리에 드는데, 벌써 두 주일 성수주일을 못했으니, 궁금해 하는 교우들의 전화며 문자메시지가 미안해, 아직 감기 기운이 머물러 있었지만 오늘은 마음 단단히 다지고 서울 행을 결심했습니다.

서울 영하 8.9도 이곳 벌판은 영하 12도로 내려가 있습니다.

중무장, 털 코트에 모자 마스크 겨울 앵글부츠로, 이런 추위면 택시를 불러도 될 일을 아예 생심도 못하고 나섰습니다. 걸어서 신작고까지 나가는 일에서 달리 방법을 찾을 생각 못하는 못난이지만 걸으며 생각하니 이 행보(行步)가 복된 길이었습니다. 감기로 두주일 이상 앓고도 이렇게 추위를 뚫고 걸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헐떡헐떡 마스크에서 올라오는 입김으로 코 위로는 입김이 얼어붙고…속눈썹까지 자꾸만 얼어붙어 앞이 보이지 않아, 마스크를 조금씩 걷었다가 다시 쓰며 달렸습니다. 털 코트 안으로 냉기가 침범했지만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하다 보니 이마며 등에 땀이 찼습니다. 20분 걸어서 신작로 버스정거장에 들어서서 땀에 찬 모자를 벗으니 털실 뜨게 모자에 서리가 앉은 듯 입김이 서리가 되어 검은 털실 모자가 하얗게 서리로 뒤덮여 하얀 털실 모자가 되었습니다. 그래도…그래도…이쯤 이 추위에 걸을 수 있게 해주신 아바 아버지께 감사를 수없이 드렸습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될는지, 앞날을 이렇게 준비시키시는 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지, 내 삶의 모퉁이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겪게 될는지 모르지만, 멍청한 걸음으로라도 그분께로 향한 길의 완주(完走)가 목표입니다. 어떤 모습, 어떤 형편에서라도 저의 삶에서는 완주해야 할 목표만 남았습니다.

동동 15분을 기다리니 모퉁이로 돌아드는 버스가 보입니다. 반가워라! 이제는 친숙해진 버스 기사에게 아침 인사를 시원스레 건네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백암에서 서울 행 고속버스와 즉각 연결되어 추위에 더 떨지 않고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우리 집 안방보다 더 따뜻했습니다.

6.25전쟁 3년을 피란지에서 지내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옥 집 겨울은 얼음집이었습니다. 두껍고 무거운 목화 솜이불을 덮고도 한동안 덜덜 떨다가 형제들과 스스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고 잠이 들던 겨울에 비하면 이런 겨울은 겨울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무렵, 부자 친구네 양옥집에 들리는 경우가 있거나, 대학 때 총장선생님 댁에 들리게 되면, 내내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닳아 오르는 일이 너무도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참을 수 없이 분했습니다. ‘제발! 제발! 얼굴 좀 빨개지지 말아다오!’그래도 우리 집하고는 너무도 다른 그 따뜻한 실내 온도는 나를 용서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볼 일을 마치고는 도망치듯 나왔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글쎄…이제, 잘 살게 된 우리나라 고속버스가 옛날 부자 집 안방 같아서, 버스를 타고 한 10분 쯤 지나면 얼굴이 술 취한 사람처럼 닳아 오릅니다. 옛날처럼 부끄럽거나 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 쯤, 우리나라를 복되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에서 신작로까지 도보 20분, 10분 내지 15분을 기다렸다가 시골버스 만나 백암 터미널에 이르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20분을 기다려 고속버스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남부터미널에서 내려 전철 3호선, 양재에서 하차, 일요일 쓸쓸한 양재 네거리를 건너 마을버스, 마을버스에서 내려, 3분 거리의 교회 도착, 동선 거리 연결이 쉬우면 2시간 반, 그렇지 않을 경우 거의 3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생전에 당신이 데리고 다니실 때, 승용차로 1시간이 걸리던 거리가 당신 떠나신 후, 3배의 시간이 들지만 이제는 그 시간에 이력이 났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저에게 주님이 주시는 확실한 운동 시간입니다.

 

예배시간에 당신이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 얼었던 몸이 녹으니 막무가내로 잠이 쏟아지네요.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잠을 자러 온 얼간이처럼 졸았습니다. 그렇게 도둑잠을 자는 잠이 얼마나 달던지요, 죽음도 그렇게 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하지만 졸기만 하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속도 상해서 멋쩍게 앉아 있는데, 성찬 순서가 되었습니다. “오늘이 너희 교회에서 치르는 성례전 주일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너를 이끌고 올라왔구나…이 추위에 내가 너를 데리고 왔다. 졸았어도 괜찮다. 그래, 그래, 괜찮다…”기쁨인지 슬픔인지 전율같은 떨림이 지나갔습니다.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 일이 오늘만큼 신비롭고 은혜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아바, 아버지, 천치 같은 저를 웃으며 건너다보시는 아바! 저는 아바의 것입니다. 주님,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조한진
Author: 조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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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2024년 11월 24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사도행전 12장

제목:   사도행전(21)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